자크 리베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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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자크 리베트는 프랑스의 영화 감독이자 영화 평론가로, 누벨 바그 운동의 주요 인물 중 한 명이다. 그는 1928년 루앙에서 태어나 파리에서 활동하며, 1950년대부터 영화 비평을 시작하여 《카이에 뒤 시네마》의 편집장을 역임했다. 1960년 장편 데뷔작 《파리는 우리들의 것》을 시작으로, 《수녀》, 《미치광이 같은 사랑》, 《셀린느와 줄리 배 타러 가다》, 《아름다운 말썽꾼》 등 다양한 작품을 연출했다. 1991년 《아름다운 말썽꾼》으로 칸 영화제 심사위원 대상을 수상했으며, 2016년 파리에서 알츠하이머병 합병증으로 사망했다. 그의 영화는 즉흥 연기, 긴 상영 시간, 문학적/연극적 영향, 현실과 허구의 경계, 여성 캐릭터의 묘사 등을 특징으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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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크 리베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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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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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자크 피에르 루이 리베트 |
출생일 | 1928년 3월 1일 |
출생지 | 루앙, 프랑스 |
사망일 | 2016년 1월 29일 |
사망지 | 파리, 프랑스 |
직업 | 영화 감독, 영화 평론가, 연극 감독 |
활동 기간 | 1948년–2009년 |
사조 | 프랑스 누벨 바그 |
배우자 | 마릴루 파롤리니 (이혼) 베로니크 마니에즈-리베트 (사망 시까지) |
대표작 | 미친 사랑 Out 1 셀린과 줄리, 배를 타다 북쪽의 다리 아름다운 앙투안 |
수상 | |
수상 내역 | 서덜랜드 트로피 그랑프리 프리 멜리에스 |
칸 국제 영화제 | 심사위원 그랑프리 1991년 "아름다운 앙투안" |
베를린 국제 영화제 | 국제 영화 비평가 연맹상 1989년 "그녀들의 무대" |
로스앤젤레스 영화 비평가 협회상 | 외국어 영화상 1991년 "아름다운 앙투안" |
2. 생애
리베트는 파리에서 어린 시절을 가난하게 보냈으며, 최소한의 자원으로 금욕적인 생활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샤브롤은 그가 매우 말랐고 거의 먹지 않았으며, 그의 미소를 체셔 고양이에 비유했다.[49] 뤼오(Gruault)는 리베트를 "왜소하고 검은 머리에 야윈 얼굴에 왁스처럼 창백한 안색을 띠고 매우 생기 넘치는 검은 눈을 가졌다... 게다가 사회에 의해 받아들여지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만 하는, 억지로 지어진 신경질적인 미소를 지니고 있었고, 그는 그 사회를 회복 불가능할 정도로 적대적으로 여겼다"라고 묘사했다.[48] 그의 의견은 동료들 사이에서 높이 평가받았으며, 두셰(Douchet)에 따르면, "[리베트는] 뛰어난 이야기꾼이었다. 그는 그룹의 숨겨진 영혼이자, 오컬트 사상가이자, 약간의 검열관이었다."[49] 고다르는 "나는 영화를 매우 좋아할 수도 있지만, 리베트가 '별로다'라고 말하면 그에게 동의할 것이다... 마치 그가 영화적 진실에 특별한 접근 권한을 가진 것 같았다." 트리포는 리베트를 가장 친한 친구로 여겼으며, 그들은 종종 시사회에서 함께 목격되었다. 트리포는 1950년대에 리베트가 이미 장편 영화를 연출할 수 있는 그룹의 유일한 멤버였다고 말했다.
리베트와 로메르의 우정은 리베트가 로메르를 ''영화 수첩''(Cahiers du Cinéma)에서 해고하는 데 직접적인 역할을 하면서 복잡해졌다. 리베트와 로메르는 서로 존경했지만, ''영화 수첩''의 정치적, 미학적 입장과 재정 문제로 다퉜다. 그들은 로메르가 리베트의 즉흥적인 영화에 관심을 갖게 된 후 다시 가까운 친구가 되었고, ''미친 사랑''(L'amour fou)을 칭찬하고 ''아웃 1''(Out 1)에 출연했다. 로메르는 나중에 ''아웃 1''을 "현대 영화 역사에서 수도 기념비이며, 영화 유산의 필수적인 부분"이라고 불렀다. 리베트 역시 로메르의 영화를 존경하며 ''파리의 랑데부''(Les Rendez-vous de Paris, 1995)를 "절대적인 은총의 영화"라고 불렀다. 로메르 시대의 여러 ''영화 수첩'' 작가들은 그를 싫어했는데, 두셰, 장 도마르시(Jean Domarchi), 페레이둔 호베이다(Fereydoun Hoveyda), 필리프 데몽사블롱(Phillippe Demonsablon), 클로드 베일리에(Claude Beylie), 필리프 뒤그(Phillippe d’Hugues)가 그들이다. 뒤그는 리베트가 "생쥐스트적인 면모를 가지고 있었고, 그에게 동의하지 않으면 바보라고 생각하는 비타협적인 자코뱅이었다. 그는 마치 감독관처럼 무엇이 도덕적이고 옳은지를 결정했다"라고 말했다. 앙투안 드 바크(Antoine de Baecque)는 이러한 작가들이 리베트를 존경했지만 그를 "무뚝뚝하고, 오만하며, 독단적"이라고 생각했으며, 그가 "적이나 평범한 사람을 주저하지 않고 파문했다"라고 썼다. 그러나 ''영화 수첩'' 작가 앙드레 라바르트(André Labarthe)와 미셸 들라예(Michel Delahaye)는 그를 칭찬했다. 들라예는 그가 "견줄 데 없는 카리스마를 가진 가장 훌륭한 인물이었다"라고 말했다.
데이비드 톰슨(David Thomson)에 따르면, 리베트는 "집에서 거의 또는 전혀 생활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했으며, 그의 작품과 겹치는 사생활도 분명히 없었다. 혼자 있을 때는 다른 영화를 보면서 어둠 속에 앉아 있는 것을 더 좋아했다"라고 한다. 1956년에는 "너무 냉담하고 접근하기 어려운 지식인"으로 묘사되었다.[28] 뷜 오지에(Bulle Ogier)는 리베트가 그의 삶에 대해 매우 비밀스러웠다고 묘사했다. "나는 그가 무엇을 하는지 전혀 모른다. 우리는 영화를 찍을 때만 그를 본다" 또는 그녀가 그와 길에서 우연히 마주쳤을 때도 그렇게 느꼈지만, 그녀는 그와 가까움을 느꼈다. 오지에에 따르면, 그는 전화를 받지 못하게 하는 신경증과 불안감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의 사생활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부주의하고 배신하는 것이 될 것이다.[24] 로랑스 코트(Laurence Côte)는 리베트의 신뢰받는 친구들의 핵심 서클에 합류하는 것은 어렵고 "극복해야 할 많은 장애물이 있었고 규칙을 존중해야 했다"라고 말했다. 마르틴 마리냐크(Martine Marignac)는 리베트가 매우 겸손하고 수줍어했으며, 그의 가까운 친구들은 오랫동안 그의 소식을 듣지 못하는 것에 익숙해졌다고 말했다. 마리냐크는 또한 "그는 영화를 보러 다니고, 책을 읽고, 음악을 들으며 인생을 보낸다. 현실 세계가 그를 공격하는 것은 분명하다"라고 말했다.[29] 조너선 로니(Jonathan Romney)는 1970년대에 "리베트는 때때로 자신의 촬영 현장에서 무단 이탈했고, 그는 항상 좌안(Left Bank) 예술 영화관 중 한 곳에서 희귀한 영화를 보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라고 보도했다.[30] 리베트를 가까운 친구로 묘사한 장피에르 레오(Jean-Pierre Léaud)는 그가 "영화의 모든 것을 본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는 그가 본 모든 것을 우리에게 전달하여 우리 자신의 미학적 아이디어를 시작하게 했다"라고 말했다.[31] 이 감독은 1990년 다큐멘터리 ''자크 리베트, 밤의 감시자''(Jacques Rivette, le veilleur)의 주제였으며, 클레르 드니와 세르주 다네(Serge Daney)가 연출했다.[24] 트래비스 맥켄지 후버(Travis Mackenzie Hoover)는 다큐멘터리가 리베트를 "고독한 경향"을 가진 사람으로 묘사하며, "어떤 개인적인 '테라 피르마'(terra firma)를 확보하는 대신 공공 장소에서 배회하거나 서성거리는 일종의 무국적자"로 묘사한다고 썼다.[32]
1960년, 그는 여자 친구인 마릴루 파롤리니와 함께 장 루슈(Jean Rouch)와 에드가 모랭의 시네마 베리테 다큐멘터리 ''어느 여름의 연대기''(Chronique d'un été)에 잠시 출연했다. 파롤리니는 ''영화 수첩''의 비서였으며, 나중에는 리베트와 다른 누벨 바그 영화 제작자들의 촬영 현장 스틸 사진 작가였다. 그녀와 리베트는 결혼했지만, ''수녀''(The Nun)의 무대 버전이 종료된 직후 헤어졌고 결국 이혼했다. 그들은 전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파롤리니는 리베트와 함께 ''미친 사랑'', ''듀엘''(Duelle), ''노로이트''(Noroît), ''사랑의 시작''(Love on the Ground)에서 공동 작가로 참여했으며, ''수녀''와 ''셀린과 줄리 배 타러 가다''(Celine and Julie Go Boating)의 세트장에서 사진을 찍었다.[33] 파롤리니는 2012년 4월 21일 이탈리아에서 사망했다.[33]
2012년 4월 20일, 영화 평론가 데이비드 에런스타인은 리베트가 알츠하이머병에 걸렸다고 온라인에 게시했다.[34] 보니처(Bonitzer)와 마리냐크는 나중에 그가 ''36 vues du pic Saint-Loup''을 촬영하는 부정적인 경험을 하는 동안 질병의 영향을 느끼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촬영 시간은 평균 4시간이었고 리베트는 종종 이미 촬영한 내용을 잊어버려 이전 영화보다 상영 시간이 짧아졌다.[35] 2000년대 중반, 리베트는 두 번째 부인인 베로니크 마니에(Veronique Manniez)를 만났다. 그들은 그가 알츠하이머병 진단을 받은 직후 결혼했다. 마리냐크는 "그녀 덕분에 그는 병원을 피했고 집에 머물 수 있었다"라고 말했다.[36] 리베트와 그의 아내는 파리의 카세트 거리에 살았으며, 그곳에서 간병인과 의사가 그의 마지막 8년 동안 그를 돌보았다.[2]
자크 리베트는 1928년3월 1일, 프랑스 센마리팀주 루앙에서 태어났다. 1950년 5월, 에릭 로메르가 주재하는 시네클럽 뒤 카르티에 라탱에서 로메르와 함께 기관지 『라 가제트 뒤 시네마』를 창간했다. 이 잡지에는 장뤼크 고다르도 한스 뤼카스 명의로 집필했다. 키오스크에서 바로 매진될 정도로 잘 팔리는 잡지였지만, 앙드레 바쟁을 비롯한 좌안의 또 다른 시네클럽인 오브제크티프 49에 의한 『카이에 뒤 시네마』의 창간 움직임에 합류하기 위해, 11월호를 마지막으로 폐간했다. 1952년 2월, 『카이에 뒤 시네마』에 영화 평론을 쓰기 시작했고, 이 시기에 리베트가 집필한 논문에는 1953년 5월호에 게재된 『하워드 혹스의 천재성』 등이 있다. 이후, 2대 편집장인 로메르의 뒤를 이어 1963년부터 1965년까지 동 잡지의 3대 편집장을 맡았다.
영화 감독으로서 1949년부터 단편 영화를 제작하기 시작해, 고다르가 주연을 맡은 『르 카드리유』(1950년)나 『왕수비차취』(1956년) 등 여러 편을 제작했다. 1958년부터 장편 영화를 시작해, 2년 후인 1960년에 장편 데뷔작 『파리는 우리들의 것』을 발표했다. 이 작품은 영국 영화 협회서덜랜드 컵을 수상했다. 이 작품은 프랑수아 트뤼포의 회사 레 필름 뒤 카로스와 클로드 샤브롤의 AJYM 필름과 공동으로 제작되었다. 리베트 자신을 비롯하여, 샤브롤과 고다르, 더 나아가 자크 드미까지 출연했다. 트뤼포는 『갑자기 지난 여름처럼』(1962년)의 극 중에서 잔 모로에게 이 작품의 제목을 외치게 했다. 이 작품에서 확립된 각본을 사용하지 않는 즉흥적인 연출 스타일은 커리어를 통해 지켜졌다. 이후, 1966년에 안나 카리나를 주연으로 기용하여 제작한 장편 2번째 작품 『수녀』를 발표했다. 제19회 칸 영화제의 경쟁 부문에 출품되었지만, 그 내용이 반종교적이라고 판단되어 한때 상영 금지 처분을 받았다. 1969년에 뷔르 오지에를 주연으로 기용한 4시간 12분 분량의 장편 『광기의 사랑』은 두 번째로 영국 영화 협회 서덜랜드 컵을 수상했다.
1971년의 『아웃 원』은 상영 시간이 12시간 40분에 달하는 영화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장편 작품이며, 이 작품의 단축판으로 1974년에 발표한 『아웃 원 스펙트럼』의 상영 시간도 4시간 15분에 달한다. 두 작품 모두 일본에서는 오랫동안 극장 미개봉이었지만, 2008년에 개최된 "자크 리베트 회고전"이라는 특별 상영에서 처음 공개되었다. 또한, 1974년에는 단편을 포함한 4편을 제작했다. 그 중 장편 『셀린느와 줄리는 배를 타고 간다』는 로카르노 영화제에서 심사위원 특별상을 수상했고, 질 들뢰즈에게 극찬을 받았다.
1980년대에는 뷔르 오지에와 파스칼 오지에의 모녀를 공동 출연시킨 『북쪽 다리』(1981년)나 제인 버킨과 제럴딘 채플린을 기용한 『땅에 떨어진 사랑』(1984년), 에밀리 브론테의 동명 소설의 무대를 1930년대의 남부 프랑스로 옮긴 『폭풍의 언덕』(1985년) 등을 제작했다. 1989년의 『그녀들의 무대』는 제39회 베를린 국제 영화제에서 국제 영화 비평가 연맹상을 수상했다.
1991년, 오노레 드 발자크의 『알려지지 않은 걸작』을 원작으로 한 『아름다운 말싸움』을 발표했다. 제44회 칸 영화제에서 심사위원 대상을 수상했다. 미술 모델 역을 연기한 배우 엠마뉘엘 베아르는 초반을 제외한 대부분의 장면을 누드로 연기하여, 리베트와 함께 높은 평가를 받았다. 같은 해, 로카르노 영화제에서 명예 레오파드상을 수상했다. 1994년에는 상드린 보네르를 기용하여, 잔 다르크의 생애를 전 2부작으로 영화화했다.
2000년대에 들어, 2001년의 『사랑의 마음』이 제54회 칸 영화제, 2007년의 『랭제의 공작부인』이 제57회 베를린 국제 영화제, 2009년의 『제인 버킨의 서커스 이야기』가 제66회 베네치아 국제 영화제에 각각 출품되는 등, 80세가 넘어서도 일선에서 활동했다.
2016년 1월 29일, 파리에서 사망[51][52]。。
2. 1. 초기 생애 (1928-1950)
자크 피에르 루이 리베트는 1928년 3월 1일 프랑스 센마리팀주 루앙의 "모두가 약사인" 집안에서 태어났다.[1] 어린 시절 친구인 앙드레 루엘랑에 따르면, 리베트의 아버지는 오페라를 사랑하는 뛰어난 화가였다.[1] 그의 여동생은 루앙의 집이 영화관 옆에 있었고, 그곳에서 리베트와 조부모님과 함께 파테 베이비의 ''펠릭스 더 캣'' 만화를 보았던 것을 기억한다고 말했다.[2] 피에르-코르네유 고등학교(Lycée Pierre-Corneille)에서 교육을 받은 리베트는 대학교에서 "그냥 심심풀이로" 문학을 잠시 공부했다.[1] 장 콕토의 영화 촬영에 관한 책 ''미녀와 야수''(1946)에서 영감을 받은 리베트는 영화 제작을 추구하기로 결심하고 시네클럽에 자주 다니기 시작했다.[1]1948년, 그는 루앙의 코트 생트-카트린 구역에서 첫 번째 단편 영화 ''오 콰트르 콩''을 촬영했다.[1] 이듬해, 그는 친구 프란시스 부셰와 함께 파리로 이사했는데, 그 이유는 "영화를 만들고 싶다면 그것이 유일한 방법"이었기 때문이다.[1] 도착한 날, 그는 미래의 협력자 장 그루오를 만나 그에게 시네클럽 뒤 쿼티에 라틴에서 ''불로뉴 숲의 여인들''(1945)을 보러 가자고 초대받았다. 리베트가 존경했던 영화 평론가 에릭 로메르가 상영회에서 강연을 했다.[2]
리베트는 국립 영화 고등 연구소(Institut des Hautes Études Cinématographiques)에 지원했지만, 학교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1] 그는 소르본에서 강좌를 들었지만, 수업에 참석하는 대신 부셰와 함께 앙리 랑글루아의 프랑스 시네마테크(Cinémathèque Française)에서 상영회에 자주 다녔다.[1] 시네마테크에서 리베트, 클로드 샤브롤, 장 뤽 고다르, 프랑수아 트뤼포, 수잔 시프만 등은 이전에 익숙하지 않았던 무성 영화와 초기 "토키" 시대의 영화에 몰입했다.[1] 그와 이 젊은 영화광 그룹은 시네마토그래프의 앞줄에 앉아 상영회를 관람하는 것이 관례였기 때문에 서로 알게 되었다.[1] 리베트는 ''게임의 규칙'' (1939) 상영회에서 트뤼포를 만났고,[1] 고다르가 먼저 인사를 하기 전까지 몇 달 동안 그 옆에 앉아 있었지만 그에게 말을 걸지는 않았다.[2]
그와 그의 친구들은 또한 로메르가 운영하는 시네클럽 뒤 쿼티에 라틴에서 상영회를 관람했다. 1950년에 로메르가 부셰를 조수로 하여 창간한 ''가제트 뒤 시네마''에 영화 비평을 쓰기 시작했지만, 잡지는 5호 만에 폐간되었다.[1] 리베트는 비평가가 되는 것이 그의 목표가 아니었지만 "좋은 연습"이라고 불렀다.[1] 그해 그는 두 번째 단편 영화 ''르 콰드리유''를 만들었는데, 고다르가 제작하고 출연했으며, 고다르는 그의 할아버지의 희귀한 폴 발레리 초판 컬렉션을 훔쳐 팔아 돈을 마련했다.[1] 리베트는 ''르 콰드리유''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영화, 단지 네 사람이 테이블에 앉아 서로를 쳐다보는 영화"라고 묘사했다.[2]
2. 2. 영화 비평가로서의 활동 (1950-1965)
자크 리베트는 1950년 9월 비아리츠에서 열린 영화제에서 자크 도니올-발크로즈, 앙드레 바쟁 등과 교류하였다. 이들은 오브제티프 49를 비판하며 보헤미안적인 "젊은 피"라는 평판을 얻었다. 리베트는 11월 ''시네마 가제트''에 오브제티프 49를 비판하는 글을 기고했고, '히치콕-호크스파'의 리더로 여겨졌다. 리베트와 그의 친구들은 영화를 반복해서 보며 토론하는 등 유대감을 형성했다.1951년, 바쟁은 ''카이에 뒤 시네마(Cahiers du Cinéma)''를 창간하고 리베트를 고용, 1953년 2월부터 글을 쓰기 시작했다. 리베트는 하워드 혹스, 프리츠 랑, 로베르토 로셀리니, 미조구치 겐지 등을 옹호하고, ''퀄리테 프랑세즈'' 감독들을 비판했다. 1954년, 리베트와 트뤼포는 영화 감독 인터뷰를 시작, Grundig 휴대용 테이프 레코더로 녹음하여 심층 인터뷰를 게재했다. 1954년부터 1957년까지 ''카이에 뒤 시네마''는 자크 베케르, 아벨 강스, 혹스, 알프레드 히치콕, 랑, 장 르누아르, 로셀리니, 오슨 웰스 등의 인터뷰를 게재했다.
영화 비평을 하면서도 리베트는 영화 제작을 병행했다. 1952년 여름, 세 번째 단편 ''레 디베르티스망''을 만들었다. 자크 베케르와 장 르누아르의 조감독으로 일했고, 트뤼포의 단편 ''위제트''(1954)와 로메르의 단편 ''베르니체''(1954)의 촬영 감독이었다. 1956년, 샤브롤과 피에르 브라운베르거의 지원을 받아 단편 영화 ''양치기의 한 수''를 만들었다. 트뤼포는 이 영화가 자신, 샤브롤, 알랭 레네, 조르주 프랑주에게 영감을 주었다고 말했다. 로메르는 미장센을 칭찬했다.
1928년3월 1일 프랑스 센마리팀주 루앙에서 태어났다. 1950년 5월, 에릭 로메르와 함께 『라 가제트 뒤 시네마』를 창간, 장 뤽 고다르도 참여했다. 이 잡지는 앙드레 바쟁 등이 참여하는 『카이에 뒤 시네마』 창간 움직임에 합류하며 11월에 폐간되었다. 1952년 2월, 『카이에 뒤 시네마』에 영화 평론을 쓰기 시작, 1953년 5월호에 『하워드 혹스의 천재성』 등을 게재했다. 1963년부터 1965년까지 동 잡지의 3대 편집장을 맡았다.
2. 3. 영화 감독으로서의 활동 (1956-2009)
자크 리베트는 1950년 9월 비아리츠에서 열린 영화제에서 자크 도니올-발크로즈, 앙드레 바쟁 등과 교류하며 영화계에 입문했다. 1950년 5월, 에릭 로메르가 주재하는 시네클럽 뒤 카르티에 라탱에서 로메르와 함께 기관지 『라 가제트 뒤 시네마』를 창간했다. 이 잡지에는 장뤼크 고다르도 한스 뤼카스 명의로 집필했다. 키오스크에서 바로 매진될 정도로 잘 팔리는 잡지였지만, 앙드레 바쟁을 비롯한 좌안의 또 다른 시네클럽인 오브제크티프 49에 의한 『카이에 뒤 시네마』의 창간 움직임에 합류하기 위해, 11월호를 마지막으로 폐간했다. 1951년 바쟁이 창간한 영화 잡지 ''카이에 뒤 시네마''(Cahiers du Cinéma)''에서 1953년부터 영화 비평을 시작했다. 하워드 혹스, 프리츠 랑 등 할리우드 감독과 로베르토 로셀리니, 미조구치 겐지 등 국제 영화 감독들을 옹호하며, 기존 프랑스 영화 감독들을 비판했다.1954년, 리베트와 프랑수아 트뤼포는 존경하는 영화 감독들과의 인터뷰를 시작했다. 이 인터뷰는 ''카이에 뒤 시네마''에 게재되었으며, 자크 베케르, 아벨 강스, 혹스, 알프레드 히치콕, 장 르누아르 등이 포함되었다.
영화 제작 경력도 이어가, 1952년 단편 영화 ''레 디베르티스망''(Le Divertissement)을 만들었다. 자크 베케르와 장 르누아르의 조감독으로 일했으며, 트뤼포와 로메르의 단편 영화에 촬영 감독으로 참여했다. 1956년, 클로드 샤브롤의 재정 지원을 받아 단편 영화 ''양치기의 한 수(Le Coup du Berger)''를 만들었다. 이 영화는 트뤼포, 샤브롤, 알랭 레네, 조르주 프랑주에게 영감을 주었다.
1958년, 리베트는 로베르토 로셀리니의 도움으로 장편 영화 ''파리는 우리 것이다(Paris Belongs to Us)''를 만들기 시작했다. 이 영화는 1960년에 발표되었으며, 영국 영화 협회서덜랜드 컵을 수상했다. 프랑수아 트뤼포의 회사 레 필름 뒤 카로스와 클로드 샤브롤의 AJYM 필름과 공동으로 제작되었다. 리베트 자신을 비롯하여, 샤브롤과 고다르, 더 나아가 자크 드미까지 출연했다. 트뤼포는 『갑자기 지난 여름처럼』(1962년)의 극 중에서 잔 모로에게 이 작품의 제목을 외치게 했다. 이 작품에서 확립된 각본을 사용하지 않는 즉흥적인 연출 스타일은 커리어를 통해 지켜졌다.

1963년부터 1965년까지 ''카이에 뒤 시네마''의 3대 편집장을 맡았다. 그의 지도 하에 ''카이에 뒤 시네마''는 마르크스주의 저널로 변화했다.[6] 롤랑 바르트와 같은 영화 제작자가 아닌 사람들과의 인터뷰를 게재하며, 영화를 기호학적 관점에서 분석하는 전환점으로 평가받는다.
1966년, 드니 디드로의 소설을 각색한 두 번째 장편 영화 ''수녀''(1966)를 발표했다. 장 뤽 고다르의 아내인 안나 카리나를 캐스팅했으며, 카리나와 함께 연극 버전도 연출했다. 제19회 칸 영화제 경쟁 부문에 출품되었지만, 반종교적이라는 이유로 상영 금지 처분을 받기도 했다.
1968년, 앙리 랑글루아 해임 사건에 항의하며 프랑스 영화 일반 회의 창설에 참여했다. 1968년 5월, 1968 칸 영화제 중단을 촉구했다.
1969년, 뷔르 오지에를 주연으로 기용한 4시간 12분 분량의 장편 영화 ''광기의 사랑''(L'amour fou)을 발표하여 두 번째 영국 영화 협회 서덜랜드 컵을 수상했다.
1971년, 12시간 40분에 달하는 영화 ''아웃 원''(Out 1)을 제작했다. 1974년, 이 영화의 단축판인 ''아웃 원 스펙트럼''(Out 1: Spectre)을 발표했다. 1974년, 장편 ''셀린느와 줄리는 배를 타고 간다''(Céline et Julie vont en bateau)로 로카르노 영화제 심사위원 특별상을 수상했다.

1976년, 네 편의 영화 시리즈 ''Scènes de la vie parallèle''를 기획했으나, 두 편(''듀엘'', ''노로이트'')만 완성되었다. 1975년, 이 시리즈의 첫 번째 영화 촬영 중 신경 쇠약으로 중단되었다.
1980년대에는 ''북쪽 다리''(Le Pont du Nord, 1981), ''땅에 떨어진 사랑''(Love on the Ground, 1984), 에밀리 브론테의 소설을 각색한 ''폭풍의 언덕''(Hurlevent, 1985) 등을 제작했다. 1989년, ''그녀들의 무대''(La Bande des quatre)로 제39회 베를린 국제 영화제 국제 영화 비평가 연맹상을 수상했다.
1991년, 오노레 드 발자크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아름다운 말싸움''(La Belle Noiseuse)을 발표하여 제44회 칸 영화제 심사위원 대상을 수상했다. 미술 모델 역을 연기한 배우 엠마뉘엘 베아르는 초반을 제외한 대부분의 장면을 누드로 연기하여, 리베트와 함께 높은 평가를 받았다. 같은 해, 로카르노 영화제에서 명예 레오파드상을 수상했다.

1994년, 상드린 보네르를 기용하여 잔 다르크의 생애를 전 2부작으로 영화화했다.
2000년대에도 활동을 이어갔으며, 2001년 ''사랑의 마음''(Va savoir)이 제54회 칸 영화제, 2007년 ''랑제의 공작부인''(Ne touchez pas la hache)이 제57회 베를린 국제 영화제, 2009년 ''제인 버킨의 서커스 이야기''(36 vues du pic Saint-Loup)가 제66회 베네치아 국제 영화제에 각각 출품되었다.

2016년 1월 29일, 파리에서 사망했다.[51][52]
2. 4. 사망 (2016)
자크 리베트는 2016년 1월 29일 파리 자택에서 알츠하이머병 합병증으로 8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38][39]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은 그를 "가장 위대한 영화 제작자 중 한 명"으로 추모했으며, 플뢰르 펠르랭 문화부 장관도 그를 칭송했다.[38][39] 프랑스 영화계 인사들은 그를 애도했다.[38] 세르주 투비아나는 "리베트는 의심할 여지 없이 누벨 바그에서 가장 사색적이고, 사려 깊고, 지적인 인물이었다"고 말했다.[40] 불 오지에는 리베트의 "작품은 창의적이고, 연구가 잘 되어 있으며, 구조가 훌륭했다. 영화 제작 외에는 그에게 아무런 관심사도 없었다"고 적었다.[40] 이자벨 레니에는 리베트의 비밀스러운 성격에 대해 언급하며, 그의 삶에 대한 미스터리가 "무덤에서도 여전히 남아있다"고 말했다.[41]시네마테크 프랑세즈의 국장 프레데릭 보노는 리베트를 영향력 있는 인물이라고 칭하며, 그가 매 영화마다 새로운 종류의 영화를 만들려고 노력했다고 말했다.[42] 오랜 협력자였던 파스칼 보니처는 "그는 누벨 바그의 아웃사이더였지만, 동시에 그 정신, 가장 급진적이고 비밀스러운 인물 중 하나였다"고 말했다.[43] 장-미셸 프로동은 그가 "누벨 바그의 정신"을 구현했다고 말했다.[44] 엘렌 프라파는 여성 묘사에 관한 그의 미장센 사용을 칭찬했다.[45] 마틴 스코세지는 그를 매혹적인 예술가이자 "프랑스 누벨 바그 감독 중 가장 실험적인 인물"이라고 불렀다.[46]
리처드 브로디는 리베트를 "가장 개방적이면서도 가장 과묵한 프랑스 영화 제작자"라고 부르며, 리베트의 모든 영화가 "내면의 세계의 충만함, 평생의 강박 관념과 미스터리를 포착하려는 노력"을 나타낸다고 주장했다.[47] 브로디는 특히 1961년 그의 논문 "혐오에 대하여"를 주목했다. 이 논문은 질로 폰테코르보의 홀로코스트 영화 ''카포''에 대한 비평이었다.[47] 브로디는 이 논문을 "만행이 저질러지는 모든 영화를 논의하는 시금석"이라고 불렀다.[47] 프랑스에서는 장-마리 포티에 또한 "혐오에 대하여"를 "프랑스 영화광 역사상 가장 유명한 텍스트 중 하나"라고 칭찬했다.[48] 세르주 다네와 앙투안 드 바엑도 이 논문을 칭찬했으며, 장뤼크 고다르의 유명한 말인 "트래킹 숏은 도덕성의 문제다"도 이 논문의 영향을 받았다.[48] 로카르노 영화제 예술 감독 카를로 카트리안은 리베트가 "앙드레 바쟁의 아이디어를 비평적 글쓰기로 옮기려는 최초이자 최고의 시도를 했다"고 썼으며, "하워드 혹스의 천재성"과 "로셀리니에 대한 편지"와 같은 논문을 칭찬했다.[49]
리베트는 2016년 2월 5일, 파리의 몽마르트 묘지에 묻혔으며, 프랑수아 트뤼포의 무덤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다.[2] 보니처, 마리냐크, 나르보니가 모두 장례식에서 연설했다.[2] 리베트의 누이와 조카들도 참석했다.[2] 베로니크 마니에-리베트는 장례식 참석자들에게 정각 20분마다 침묵의 순간에 천사들이 노래한다고 하는데, 리베트는 오후 12시 20분에 사망했다고 말했다.[2] 2016년 3월호 ''카이에 뒤 시네마''는 그에게 헌정되었다.[37] 2016년 5월 시네마테크 프랑세즈는 리베트의 미망인이 그의 첫 세 편의 단편 영화를 재발견하여 복원, 6월에 열리는 코테 코르 영화제에서 상영할 예정이라고 발표했다.[50]
3. 주요 작품
- 양치기 전법 (1956, 단편)
- 파리는 우리의 것 (1961, ''Paris nous appartient'')
- 수녀 (1966)
- 미치광이 같은 사랑 (1969, ''L'Amour fou'')
- 아웃 원 (1971)
- 셀린느와 줄리 배타러 가다 (1974)
- 대결 (1976)
- 북서풍 (1976)
- 회전목마 (1981)
- 북쪽에 있는 다리 (1981)
- 지상의 사랑 (1984)
- 폭풍의 언덕 (1985)
- 4인조 (1989)
- 누드 모델 (1991)
- 잔 다르크 (1994)
- 파리의 숨바꼭질 (1995)
- 뤼미에르와 친구들 - "Une aventure de Ninon" (1995)
- 은밀한 방어 (1998)
- 알게 될거야 (2001)
- 마리와 줄리앙 이야기 (2003)
- 도끼에 손대지 마라 (2007)
- 작은 산 주변에서 (2009)
- 자크 리베트 영화 목록
- 자크 리베트 저서 목록
- 자크 리베트 작품의 주제와 스타일
3. 1. 파리는 우리들의 것 (1960)
3. 2. 수녀 (1966)
3. 3. 아웃 원 (1971)
3. 4. 셀린느와 줄리는 배를 타고 간다 (1974)
3. 5. 아름다운 말썽꾼 (1991)
4. 영화 스타일
4. 1. 즉흥 연기
4. 2. 긴 상영 시간
4. 3. 문학과 연극의 영향
4. 4. 현실과 허구의 경계
4. 5. 여성 캐릭터
5. 영향 및 유산
5. 1. 누벨바그 운동
5. 2. 영화 비평
5. 3. 후대 영화 감독들에게 미친 영향
6. 작품 목록
- 양치기 전법 (1956, 단편)
- 오 꺄트르 꼬앙(Aux quatre coins) (1949년, 단편)
- 르 까드리유 (Le quadrille) (1950년, 단편)
- 르 디베르티스망 (Le divertissement) (1952년, 단편)
- 체크메이트 (Le coup du berger) (1956년, 단편)
- 파리는 우리의 것 (1961, ''Paris nous appartient'')
- 수녀 (1966)
- 미치광이 같은 사랑 (1969, ''L'Amour fou'')
- 아웃 원 (1971)
- 셀린느와 줄리 배타러 가다 (1974)
- 대결 (1976)
- 북서풍 (1976)
- 회전목마 (1981)
- 북쪽에 있는 다리 (1981)
- 지상의 사랑 (1984)
- 폭풍의 언덕 (1985)
- 4인조 (1989)
- 누드 모델 (1991)
- 잔 다르크 (1994)
- 파리의 숨바꼭질 (1995)
- 뤼미에르와 친구들 - "Une aventure de Ninon" (1995)
- 닌의 모험 (Une Aventure de Ninon) (1995년)은 옴니버스 『킹 오브 필름/거장들의 60초』의 1편이다.
- 은밀한 방어 (1998)
- 알게 될거야 (2001)
- 마리와 줄리앙 이야기 (2003)
- 도끼에 손대지 마라 (2007)
- 작은 산 주변에서 (2009)
6. 1. 장편 영화
자크 리베트는 1956년 단편 영화 《양치기 전법》을 시작으로 여러 장편 영화를 감독했다. 1961년에는 《파리는 우리의 것》, 1966년에는 수녀를 감독했다. 1969년 《미치광이 같은 사랑》, 1971년 아웃 원, 1974년 셀린느와 줄리 배타러 가다를 감독했다. 1976년에는 대결과 북서풍을 감독했다.1980년대에는 회전목마(1981), 북쪽에 있는 다리(1981), 지상의 사랑(1984), 폭풍의 언덕(1985), 4인조(1989)를 감독했다. 1991년에는 누드 모델을 감독했고, 1994년에는 잔 다르크를 감독했다. 1995년에는 파리의 숨바꼭질과 뤼미에르와 친구들의 "Une aventure de Ninon"을 감독했다.
1998년 은밀한 방어를 감독하고, 2001년에는 알게 될거야를 감독했다. 2003년 마리와 줄리앙 이야기, 2007년 도끼에 손대지 마라, 2009년 작은 산 주변에서를 감독했다.
6. 2. 단편 영화
오 꺄트르 꼬앙(Aux quatre coins) (1949년), 르 까드리유 (Le quadrille) (1950년), 르 디베르티스망 (Le divertissement) (1952년)을 제작했다. 체크메이트 (Le coup du berger) (1956년)를 만들었다. 닌의 모험 (Une Aventure de Ninon) (1995년)은 옴니버스 『킹 오브 필름/거장들의 60초』의 1편이다.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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